부처님의 장례와 유골(사리)의 분배
부처님의 장례식과 유골의 분배
★ 부처님에 대한 사모가 더욱더 커지다
인도 각지에 흩어져 수행에 전념하고 있었던 제자들에게 부처님의 열반 소식은 빠르게 전해진다. 그들은 쿠시나가라에 모여 부처님의 열반을 슬퍼하였다. 그 중에 수행이 깊은 이들은 생사의 무상함을 부처님께서 몸소 가르쳐 주신 것이기 때문에 슬퍼하지 하지 말라고 대중들을 달래기도 한다.
일부 출가자들 중에는 이제 부처님이 없으니 여러 가지 엄한 계율들로부터 해방되었다고 기뻐했던 이들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대부분의 제자들은 교단의 새 지도자 마하가섭의 지도를 따랐다.
부처님의 장례는 쿠시나가 일대에 살고 있었던 마가족에 의해 거행된다. 제자들이 장례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는 수행자가 제사에 관여하는 것 보다는 수행에 전념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주검은 깨끗한 새 천에 정중히 쌓여, 행료를 뿌린 장작 위에서 다비에 붙여진다.
부처님의 열반소식을 들은 각지의 왕족들이 사자를 보내왔고, 이들이 모두 자신들이 부처님의 유골을 모실 자격을 주장하여 다툼이 일어난다. 한 바라문의 중재로 사리는 팔분되어 각각의 부족들에게 보내지고, 이로서 각각의 지역에 사리탑이 건설된다. 또한 다비시에 남은 재와 사리를 나눌 때 사용한 병을 모신 탑이 각각 세워져 모두 10개의 사리탑이 세워진다. 이 탑들은 후대에 다시 나뉘어져 인도 전역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탑이 세워졌다고 한다.
부처님의 열반은 불교교단의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되는 계기가 된다. 이미 직접 부처님께 설법을 들을 수 없게 되자, 부처님을 흠모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부처님에 대한 흠모의 마음은 지금까지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실천하는 수행 뿐만 아니라, 부처님에 대한 추모, 즉 기도라는 형식을 만들어 낸다. 이는 기존의 수행과 더불어 신앙이라는 종교적인 색체를 불교가 가지게 되었음을 의미한다.